
대전골 영골집단 학살 사건
1993년 대전시 동남에 위치한 조용한 야마야에서 식재자들은 곳곳에 펼쳐진 뼈를 발견했다.
깜짝 놀란 심 기자는 마을 노인을 만나 골령골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계곡에서 사람의 뼈가 너무 많이 나오고 뼈 영골이라고합니다. 도대체, 거기서 무엇이 있었는지?
이 비극적인 사건은 19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전쟁 발발 이틀 후, 충남 서천에 살던 남식 씨의 아버지는 경찰에 붙잡혀 잠시 후 아버지를 찾아낸 작은 아버지까지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전국 각지에서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전선에서 인민군과 격렬한 전투가 이뤄진 그때 후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사라졌다.
한편, 내무성 치안국으로부터 전국 경찰국에 하달한 문서 전문에는 이러한 내용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전국의 요시자 전원을 구금한다” 요시자란 사상이나 보안 문제로 감시 대상이 된 사람들로, 좌익 세력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남식 씨의 아버지는 경성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한 수재로 동아일보 니시카와 지부장까지 맡은 인물이었고, 좌익 활동은 전혀 없는 인물이었지만.. 그는 왜 붙잡혔는가?
당시 한국은 미군정에 통치를 받았지만 남식 씨의 아버지는 미군정에 반발하는 집회를 취재했다고 합니다.
그 후 그는 정부에서 만드는 국민보도연맹의 니시카와 지부장을 맡으면 처벌되는 것은 용서해준다는 제안을 받아 미군정에 반발하는 집회를 취재한 것이 좌익 행동으로 찍혔습니다. 이에 대해 자수하면 죄를 묻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남식 씨의 아버지는 부득이하게 제안을 받아들여 당시 이 단체에 가입한 인원은 무려 30만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경찰은 보도연맹원을 덮친 것처럼 잡혔다. 이들이 인민군 측에 서도 있을 수 있다고 예비 검속을 했고, 그렇게 남식 씨의 아버지도 대전 감옥에 끌려갔다.
대전 감옥에는 제주 사건과 여순 사건 관계자도 있었다. 이후 이들은 부터 30일까지 골령골에서 살해당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무려 1400명이 죽었다. 나무의 기둥에 묶인 채 총살해 시신이 5, 60구 모이면 장작의 산에 던져 화장을 시켰다고 합니다.
비극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 인민군이 대전을 점령하기 전에 남은 재소자의 처형을 지시해, 2차 처형이 시작되었습니다.
재소자를 실어 골령골로 향한 헌병대는 긴 구덩이 앞에 재소자를 쏟은 후 총살했다. 확인 사살까지 한 후, 구덩이로 몸을 밀어 넣고, 다음 거주자를 데리고 다시 총살하도록 총 3일간 처형했습니다.
이 무서운 것은 1999년에 공개된 미국의 비밀 문서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3일 동안 1800명이 학살되었고, 이러한 학살은 전국 각지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분명히 상위층에 명령이 있었다는 것을 확신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미국도 이미 알고 있는 대량 학살, 그러나 그들도 침묵을 선택했다
또, 새로운 재소자로 채워진 대전 감옥, 그들은 다시 같은 방식으로 골령골로 처형되었고, 그렇게 군국이 후퇴하기 전에 3차 학살로 약 1700명이 희생되었다.
이후 인천상륙작전에서 전세는 뒤집혔지만 폐허가 된 대전으로 돌아온 사람들이 마주한 것은 시신이 가득한 대전형무소의 모습이었습니다.
, 골령골로 학살 현장을 목격한 인민군은 가해자를 찾아 경찰과 공무원 등 우익 인사를 습격하도록 잡혔다. 그들은 대전형무소를 인민교화소라고 부르며, 양민을 탄압하고 학살한 죄를 인정하는 설명서를 썼습니다. 또한 그들은 후퇴 전 3일 동안 재소자를 향해 무자비한 학살을 했지만 그렇게 1557명이 다시 살해되었다.
전국 각지에서 이러한 일이 반복되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형태가 되었습니다. 남과 북 모두에서 일어난 민간인의 학살 사건이지만, 한국군경에 의한 학살은 장시간 묻혀 있었다 인민군 학살만 알린 정부는 인민군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을 위해 조사위원회가 설치되어 위령비도 세웠지만, 우리 경찰에 의해 학살당한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살아 오랫동안 비극이 묻혀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기사를 통해 1992년 골령골의 비극이 세계에 알려졌다. 4천300여명이 학살된 대전 형무소 학살 사건. 그리고 스토리의 시작인 골룡골에 서 있던 심 기자가 이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아 현장에 갔던 것입니다.
심 기자는 골령골 사건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진상조사단을 시작하여 유족회 결성 그리고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자 2007년 대전골 영골을 최초의 유해발굴지로 선정하
그렇게 유해 발굴이 시작되어 2곳의 매장지에서 각각 29구와 5구의 유해가 발견되었습니다. 2평 남은 공간에서 29구의 유해가 나온 한 매장지에서는 A4 한 장의 공간에서 한 명의 두팔뼈가 겹친 채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유족들은 유해 발굴 뉴스에 민간인 학살의 증거가 나왔다는 것만으로 기뻐했다 남식의 가족에 따르면 학살보다 힘들었던 것은…연좌제였다고 합니다. 아버지를 잃은 유족들에게 찍힌 낙인으로 유족들은 단지 하루도 편하게 살지 않아 시선을 여유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진화위가 해산되면 모든 것이 물의 거품이되었습니다. 이후 2016년 정부는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 추도 평화공원 설립을 추진하
이로써 심 기자는 골령골을 평화공원 건립지로 선정되도록 유치 TF팀까지 세우고 대전골령골이 추모공원 건립지로 선정되었습니다. 평화공원 건설이 결정되면 정부 수준의 유해 발굴도 재개되었다.
이에 꼽히지 않을 정도로 많은 유해한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이전에 발굴된 것까지 총 1441구의 유해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평화공원이 건립되면 거기에 안장할 계획이었던 유해는 지금까지 누워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2020년까지 건설하기로 한 평화공원 공사에 현재 2024년인데..초삽도 못했습니다
현재 유해한 사람들은 세종시의 기념물 집에 일시적으로 안치되어 있습니다.
57년이 걸려 골령골에 묻힌 사람들을 찾아 60년이 걸려 정부의 잘못인 것으로 판명된 골령골 학살 사건. 그러나 74년이 지난 지금도 유해는 방황하고 있다는 사실이… 꼭 평화 공원이 세워지는 날이 빨리 와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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