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게시 : 19:06:53 (25 페이지) <내 대항해와 기항지에서 일어난 이야기> 서문 타이틀에서 대항해라고 쓴 것은 지금까지 가까운 항해로서 일본, 필리핀, 인도네시아 그리고 좀 더 먼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 동해안과 호주 항구 정도까지였지만, 이러한 항로에 비해 내 대항해는 훨씬 긴 항해였다. 그리고 기항지의 이야기도 주로 대서양, 발틱해, 그리고 지중해와 흑해 연안의 항구다. 덧붙여서 지리상의 대발견 시대의 일환인 대항해 시대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시작한 15세기 후반부터 캡틴 쿡이 태평양 일대를 탐사해, 호주와 뉴질랜드 등의 남태평양 0년. 덧붙여서 이것은 조선왕조계보에서 보면 연산군에서 영조까지 십이임금 재위기간 280년에 해당할 것으로 보인다. 역사상 이 시기는 요즘 몇 차례 산업혁명에 우선하는 인간의식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예를 들어, 마젤란(포도 )의 세계 일주가 지구는 둥글림을 증명한 것을 비롯해,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라틴 아메리카 식민화를 위한 해상 활동, 네덜란드와 영국의 해양 패권 경쟁 등이 그런 것이지만, 이 시대에는 대범선 교역료 이 시기에 이미 세계 현대 문명도의 스케치는 거의 그려져 있었다. 이런 대항해 시대의 와중에서 조선제주도 연안에는 두 건의 해난사고가 있었다. 하나는 일본에 간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 소속 선박 우벨커크호가 태풍을 만나 표류하는 제주도 연안에 표박 중에 선원 3명이 몰래 상륙해 물과 나무를 구하려고 관헌에 체포되어 조정에 압송됐다. 그 후 그들은 조선으로 귀화해 훈련도감에 소속해 병자호란에 참전했지만 두 사람은 전사해 하나가 살아남았지만 그가 조선 최초의 서양귀화인 박연 혹 박연이었다.
77년 XX월 XX일 내 대항해 시대의 시작은 미국 뉴욕 5번가에 소재하는 M사 소속의 호를 승선한 것으로 시작됐다. 이 배는 일본 오사카항에서 호주 서해안까지 철광석을 운반하는 항로에 투입되었지만, 노르웨이 베르겐 조선소에서 건조한 배로 선장실이 마치 호텔 라운지처럼 잘 장식되어 있어 전망이 파노라마로 매우 좋았다. 공상이지만, 바이킹의 Long Ship을 연상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이렇게 배를 잘 만드는 거라고는 생각했다. 적재항 포트 하들랜드는 남위 20도 정도에 위치하지만, 근처가 Great Sandy Desert(대모 라사막)다. 여름의 기온은 45도 이상 올랐다. 부두 부근에는 일부 작업 유부녀들을 제외하고 일반인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하루는 선원 한 명이 위로가 있다고 선장실에 왔다. "무슨 일이야?" 선원은 주머니에서 장식된 메모를 꺼내 보여주고 말했다. "이것은 여기 한국인 친구의 주소이지만, 그의 집을 조금 찾아주세요" "찾기 힘들다..." "돈을 빌려주었습니다만,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어떤 친구인지 물었더니 지난번 항로 때 본선에 놀러 와서 알았는데 그때 돈을 빌려줬다는 것이었다. 풍파로 벌어들인 돈을 부두에서 그렇게 쉽게 빌려주고, 안에 여기에서 작업 유부녀실에 찾아갔다. 주소를 본 작업반장은, 맞은편이 낮은 산 언덕의 배기에 집이 몇개인가가 보였지만, 그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밖은 역시 숨이 막히는 더위인데, 붉은 광석 가루가 온 천지를 덮고 길을 걷는 것이 마치 서부 영화에서도 본 장면 같았다. 사실 미국 서부는 신사의 땅입니다. 호주에는 더 이상 들어가면 살아가기 어렵다는 표시로 두개골의 그림을 간판으로 세웠던 곳이 많기 때문이다. 광석가루를 뒤집은 작은 집은 주소도 물론 모두 광석가루로 덮여 있었지만, 하나하나 맑고 닦아 겨우 찾아냈지만, 노크를 해도 전혀 인기 척이 나오지 않아 철수했다. 빌려준 선원도 선원이지만, 그 후 돈을 빌려 간 문제의 호주 동포의 어려움을 나는 추측해도 나머지가 있었다. 적당한 기술이나 돈이 없으면 이런 곳에서 일하는 것이 당시 해외동포청년들의 공통된 모습이었다.
필라델피아에서 하역을 했는데, 다른 축이 좀 더 나타나 보였지만, 언뜻 보면 아무런 이상도 발견할 수 없었다. 한 아름다운 인근의 강기둥이지만 15도 정도 비틀렸는데, 외형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었다. 역시 강철은 강철이었다. 항해가 재개되었습니다. 차항은 콘넷티캇주의 브리지 포트였지만 배가 그 상태이지만 뉴욕 맨해튼의 이스트 강을 통과했다. 이스트 강에서 보는 UN 건물은 또 다른 풍경을 자랑했습니다. 브리지 포트에서 마지막 짐을 내려 배는 뉴어크(Newark) 수리 조선소에 들어갔다. 맨해튼 5번가에 있는 본사에 가까워, 본사 직원이 하루 한 팀씩 견학에 왔지만, 나는 좋은 경험을 해 격려해 주었다. 그래서 한 달 정도 머물러야 한다는 스케줄이 나왔다. 잃어버린 앵커와 앵커라인을 도로에 찾아 검사해, 재설치해야 하고, 조타축을 빼내, 재작성한 축으로 교환해야 한다는 검사 결론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고에 대한 조금 조언만 하면 거의 할 일이 없어서 뉴욕 관광은 북쪽의 컬럼비아 대학에서 남쪽으로는 자유의 여신상까지 많았던 것이었다. 링컨센터에서는 종일 오파라를 관람해 뉴욕필로 관현악을 시청하기도 했다. 밤이라면 한국 가수들이 노래하는 한국 식당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루틴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본사 부사장이 만난 전갈이 와서 들었더니 벨기에 브뤼셀 항구에 머물고 있는 콘티넨탈 S호를 승선해 발틱해 레닌그라드 항구에 조금 갈 수 없는가 하는 제안을 들었다. 곡물을 만선한 배인데 한국 선장을 비롯해 한국 선원이 소련에 입국하지 않는다는 것, 그 이유는 귀국하면 불이익을 크게 받는 것이었다. 나는 곧바로 말씀의 사정을 추측해도 나머지가 있어, 즐겁게 갈 것이라고 대답했다. 부사장은 안도의 휴식을 토했다. 보충선원들은 한국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내일에도 곧바로 귀임해달라고 요청받았다. 뉴욕은 앞으로 계속 오는 기회가 있기 때문에, 다시 보듯이 잘 가자고 격려해 주었다. 나로서는, 심각한 판에 잘 갔던 것이었다. 그는 나를 5층 VIP 레스토랑으로 안내하고 식사를 함께 하려고 했고 메뉴도 직접 자신이 종아리에게 추천해줬다. 식사 후에는 활기찬 호스테스가 하바나의 시가 케이스를 들고 열어 보였지만 부사장은 하나 주워 "손자에게 가져와야 한다"고 말했지만, 호스테스는 "할아버지 주는 것일까요?"라고 농담을 했다. 나를 봐도 기념에 하나 가지고 싶다고 말해지므로, 하나 하나 위의 포켓에 넣었다.
78년 XX월 XX
현지로 귀임해 하선되는 선장의 조언대로 한국영사관에 가서 일종의 사실신고서를 작성해 날인서명을 받았다. 영사가 말하는 말이 “중요한 장면을 사진을 찍고 리포트를 만들어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알았습니다」라고 대답해 나왔습니다만, 「내가 어떤 스파이 교육에서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사고가 일어나면, 자신이 책임 있어도 진단의 말일까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콘티넨탈 S호는 드디어 새로운 승무원들과 협상되어, 소련이라는 적지를 향해 출연했다. 도버 해협을 통과해 북해(North Sea)를 항행할 때 연령이 지친 도선사는 자신의 이야기를 꽤 많았다.
쉘블항에서는 주로 프랑스의 도선사를 고용하기 위해 노력해 영국의 도선사를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이야기를 비롯해 스코틀랜드에서 튼튼하지만, 오래된 집에서 연세가 많은 누나를 모시고 사는 윌리엄스와 자기 소개했다. 북해를 자신의 정원처럼 되돌아보았다고도 했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면 아들이 하나 있지만 공부를 하지 않고 너무 종사하는 영구직장이 없다고 겁쟁이로 대답했다. 나는 안에 좋은 질문을 하고 싶었다.
배가 덴마크의 북쪽 끝에 이르자 유라누스 호수의 탄생지 노르웨이 베르겐 조선소가 가까워 롱쉽의 바이킹들이 생각나게 들었지만 그들의 약탈에 윌리엄스는 목을 끊었다. 우리나라에 닿으면 왜구의 학대처럼 그랬는지 봤다. 스코틀랜드는 일찍이 남쪽에 영국과 북쪽에는 바이킹들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으려고 고난을 많이 경험했다고 말했다. 바이킹들이 가장 활동을 많이 한 시기는 한국에 치면 여시대(1014세기)쯤으로 보인다. 일명 노르만족인 그들은 동토의 북쪽보다 주로 남쪽을 경영해 활동 영역으로 파악한 것보다. 프랑스의 시안 노르망디 지역은 그들이 침략하여 살아 있던 땅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었다.
영화 덧붙여서, 다음은 구스트로프 호수의 침몰 장면이다. 인공위성이라면 설현인데, 막상 서병 인공위성은 자신의 정원을 먹고 사는 곡물 재배 상황은 미국의 위성에 의존해야 한다니 확실하지 않았다.
78년 XX월 XX일
마침내 배가 항구에 입항하게 되어 곡물 전용 하역 부두에 도착했다. 많은 출입국 관리자와 대리점 직원이 승선하여 입항 수속이 이루어졌다. 사무장은 입항 경험이 있어, 수속을 지장없이 진행하고 있었다. 미국에서 사온 선물을 제대로 찔러주면서 일사천리로 나아가 마감됐다. 젊은 여성 케어 한 명은 굉장한 지방이었지만, 비밀에 다가와 향수를 요구했지만, 대신에 스타킹을 구해 주자 곧 배에 말려들어 패션 모델처럼 한 바퀴 정도면서 괜찮을까 물었다. 뷰티풀이라고 말했더니 그녀는 윙크로 감사의 표시를 남기고 밑줄을 섰다.
이곳 레닌그라드 항에서는 세관절차는 간편했고 대신 군인이 출입국 감시 업무에 충실한 듯했다. 본선 트랩 아래에 군인이 당직을 세웠지만, 작업 유부녀들의 출입증도 일제히 검사하고 있었다. 대행사 직원에게 곡물 검사원이 꽤 검사를 철저히 하고 있다고 하면, "이 곡물은 기차를 타고 매우 먼 내륙으로 운반되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안에 “대서양을 건너 또 이 넓은 설령 천지 어디까지 올려갈까”라고 궁금했다.
도선사 윌리엄스 선장을 귀국시키기 위해 함께 상륙했다. 혁명기념일이 다가오고, 그 후 네프스키의 대로에는 붉은 깃발이 물결치고, 높은 건물의 벽면에는 가혹한 모습의 레닌의 초상화가 가는 곳마다 시야를 막아 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우선 은행에 가서 환전을 하고 손에 루불화를 조금 잡으면 다리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자본주의의 마인드니까. 윌리엄스 도선사가 출국 수속용 사진을 즉석 사진기로 찍고 있는 동안, 나는 근처의 신발 수리소를 열심히 구경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혜진구두를 창구에서 접수하면 담당직원이 내용을 조사하고 메모를 붙여 안에 둔다. 토지가 마유키 쿄비에 질주해 주로 가죽 장화를 많이 신고 또 수리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묵호항의 상황이 빨리 연상됐다.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구두 수리점의 점포는 한국의 은행과 같은 요지에 있어, 여기의 은행은 한국의 신발점보다 훨씬 열등한 구석구석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돈보다 신발이 더 생활 필수품이기 때문일까. 45도를 넘는 보드카를 아가씨는 한입 넘기고 순간 오렌지 주스로 입속을 하고 있었다. 그런 독한 술을 일항사는 그냥 마셔 이성을 잃었는지. 무대에서는 마이히메들이 러시아 춤을 추고 있다. 여성들은 우리를 보고 청바지를 사고, 달러를 팔려고 했다. 100달러에 몇 루블을 들고 조금 물었더니 400루블이 암시세라고 귀속했다. 앞서 우리는 은행에서 60루돌을 받았기 때문에 그 차이는 어떨까. 선원들의 귀선시간이 자정까지였기 때문에 우리는 11시에 앉았습니다.
그의 출국이 며칠이 걸렸고 죄송합니다. 대신 여성들과 암거래한 루불화로 매일 그 레스토랑에서 파티를 하고 있었다. 며칠 후 드디어 레닌그라드 공항에서 도선사 윌리엄스 씨를 파리행 비행기편으로 되돌려 보내 냈다. 돌아오는 길에 선원들과 함께 레닌그라드 곳곳을 관광했지만, 관광버스 비용을 루푸화로 지불하면 한국 돈으로 약 2만원 전후였다. 선원들은 무엇을 팔았는지, 루불화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수로에 따르면 레닌그라드는 네바 강 하구에 있으며, 그 델타 지대의 자연섬과 운하에 의해 생긴 수많은 섬 위에 지어진 도시다. 이 점에서 발트해의 베니스라고 불릴 정도로 아드리아해의 베니스와 비슷한 점이 많다. 베니스도 400여개 섬에 지어진 도시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몬스터 황제 표틀 대제(피터 대제 : Peter I The Great )는 바이킹과의 전쟁, 스웨덴과의 북방 전쟁도 승리로 이끌어 앞서 언급한 발틱 함대도 창설했다. 이 도시를 서양식으로 건설해 1914년에 패트로그라드라고 불렀지만 공산혁명 후 1924년 초 레닌이 죽자 그를 기념해 레닌그라드로 불리게 되었다고 했다. 로마에 가면 이런 말이 있다. "로마는 하루에 볼 수 있지만 한 달 동안 볼 수는 없습니다."
레닌그라드도 그런 도시였다. 어떤 경로로 그리고 어떤 사정으로 여기까지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국 삼국사기의 진귀본도 여기 어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했다. 여기에는 우스벤스키라는 묘지가 있으며, 그들은 세계 최대의 묘지로 불렸다. 조용한 숲 속에 환상곡이 맑고 조용히 흐르는데 모국(Mother Land)이라는 비석 위에 검을 높인 여인상이 서 있으며, 모든 사망자는 3040㎝의 높이, 사방 10M 넓이 정도의 지중에 합창된 모양이었지만, 2 한 해다. 저는 생전 처음 듣는 질문이므로 말이 막혀 단지 머리를 조금 섞으면서 "무엇과 이야기해야 하는가?"라고 주저한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다시 이렇게 말해, 내 심기를 들은 것은 아닐까. "선장, 잘못 알고 있니?"
나는 또한 말이 막혔지만, 목을 천천히 끄덕이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평소의 고정관념을 어떤 계기로 순식간에 바꿀 수 있는 위트는 훌륭한 인격이다"
나는 그녀에게 선물을 좀 한다고 했지만, 규정상 받으면 큰 일을 한다고 거절했지만, 우리 가족이 설령 친구에게 주는 것이라서 받겠다고 했고, 달러 몇 장을 봉투에 넣고 가족과 식사라도 한다고 말하고 간신히 건네주었다. 감사를 연발했지만, 소련인이라며 모두 크렘린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 그녀에게 나도 감사했다.
78년 XX월 XX일
항무국 직원 도미토리는 유대인이라고 자기 소개하면서 드문 것이 있기 때문에 사 정말 졸린다. 뭔가 물어보면 먼저 내 사무실 문을 잠그고 오면 침실에 잠시 들어가려고 침실에 들어가면 침실 문을 잠그고 다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들어가 화장실 문을 딱 잠겼다. 그런 다음 열쇠로 가방을 열면 책 크기의 나무 판자를 내 앞에 내밀었지만 거기에는 예수와 마리아의 그림이 그려져있었습니다.
러시아의 정교 의식으로 예배를 볼 때 사용하는 이른바 아이콘이라는 성상의 그림이었다. “나는 예수교도가 아니라 이것을 사서 어디에 쓰는지”라고 물었더니 뉴욕에 가서 팔면 골동품으로 높게 팔린다고 하며 런던의 어떤 골동품 회사가 발행한 책자까지 내놓고 이것도 믿을 수 없는 것인지 고통했다. 그러나 예수 성화를 밀무역해 돈을 벌 수 있는 생각은 추모도 없었고, 단지 대문 호막심 고리키의 청만전한 자전 소설 <어린 시절, 칼제 시대>라는 책에서 본 성상 화가 보조로서의 재미있는 장면이 떠오르고 기념.
그건 그렇고, 그는 조금 더 팔려고 내 아파트에 나를 데려갔다. 매우 추운 곳이므로 다른 건물처럼 아파트 벽도 매우 두껍고, 통로에는 스팀 히터가 보였고, 현관문에는 코멘트가 붙어 있었지만, 너무 두껍고 마치 침대 메트리스를 설치한 것처럼 보였다. 도둑이 많아 그런지 비밀이 많아서 그런지 울던 열쇠 패키지를 잠시 철거하고 방문을 하고 또 다시 열쇠를 채웠다. 방안에 일제 전축이 보이고 어디서 구했는지 물었더니, 그는 "돈만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여자친구도 많이 있습니다"라고 부끄러워하는 것이었다. 그의 테이블 위에 몇몇 아이콘이 있었지만, 성모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것을 하나 더 샀다. 이탈리아 대성당에 가면 볼 수 있는 벽화가 깨어나도록 목판에 그려진 것도 있었다. 소련에서 이런 것을 사는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밤늦게 배달해준 것을 머리 속에 놓고 감상하고 있기 때문에 그로부터 들은 말이 떠올랐다. “서룡만큼 돈벌이가 좋고, 설현만큼 돈을 쓰는 좋은 나라도 없을 것입니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우리 회사도 유대인 회사인데, 그렇게 교활하지 않은데. <지붕 위의 바이올린>이라는 영화도 주인공이 쏘는 유태인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는데. 이런 생각으로 졸음에 빠져 있었다.
78년 XX월 XX일
선원들로부터 청바지를 구입한 유부녀들이 세관에 잡히고 밀무역이 돈톤나 세관원들이 조사차에 승선했다. 바지 하나에 100루돌씩 총 1,000루블이라는 벌금이 걸려 공식 환율로 약 1,700달러가 됐다. 선원들의 손실이 너무 커서 걱정돼 그들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선처를 요청하겠다고 했더니 의외로 부드러워졌지만 사무장과 함께 밖으로 잠시 나가서 돌아와서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번 사건은 없었던 것으로 깨뜨리자」
그와 함께, 열심히 작성한 일건의 서류를 휴지와 같이 꺾어 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모두에게 돌아왔다. 사무장이 어떻게 됐는지 물었던 것은 청바지 두 장으로 해결해 보았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청바지 한 장의 시중가격이 얼마나 될지 물어보면 150루블 정도 호가한다는 것. 그들의 한달의 월급에 가깝다는 것은 놀라웠다. 원가는 얼마인지 물어보니 한국에서 작업복을 하려고 사온 것이라고 말했다. 모르는 것이었다. “한국의 작업복은 여기서 이렇게 좋아하나요?” 필리핀 선원들이 소련항을 “선원들의 낙원”이라고 했다. 그 의미를 조금 알았다.
78년 XX월 XX일
선원과 함께 병원에 갔다. 나는 진짜 환자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원은 알고 있고 "나일론" 환자이었다. 그들의 말대로 지구의 끝까지 쫓겨온 해생활에서 얻은 것은 스트레스라는 적폐뿐인데, 열악한 병원의 대기실에서 다만 앉아 있지 않고, 냄새나는 놈으로 모두 도망친 것은 아무래도 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소련은 인구당 의사수가 가장 많은 나라로 선전되고 있지만 의료시설이나 약품사정은 사정이 나쁘지 않았다. 나는 통풍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혈액 검사가 기본이었는데도 생략하고 파라핀 찜 요법만 해 주었다. 인생이 뜨개질이라면 풀리고 또 다시 부추길 뿐… 국명 아르헨티나라는 말과 카와나 플라타라는 말도 은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금광을 캐로 서부 개척에 나선 미국인은 당연히 지사와 치고, 은이라도 캐릭터 지구 반대편에까지 온 한국 이민자에게 모인 운명 같은 편물 인생 고기가 무엇인가. 꼭 잘 짠 천지 신명에게 기도해 보았다.
78년 XX월 XX일
칼로라인호는 콘티넨탈 S호와 같이 곡물을 약 3만t톤 적재해 로사리오를 떠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항 앞에서 플라타 강의 도선을 하선시키고 약볼름을 항해한 뒤 급유항 라스팔마스에 기착했다. 약 1,500톤의 급유와 또 약 60일분의 식료품이 보급된다. 이곳은 한국어선 대서양 전진기지이므로 한국어선원과 주재원이 많이 살고 있으며 신선도가 높은 한국식품과 생선을 구입하는데 안성축제다. 그리고 여기서 선원들은 소련 무역품을 구입해야 하는데 좁은 뜸 갈 때가 아니라 소련 특수풍이 불어 성시를 이루었다. 다른 배도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급유에 입항해 역시 노점상에서 성시를 이룰 것이다. 우리 선원들은 이와 같은 파도시를 갈매기 시장이라고 부른다. 갈메기는 배가 출항해 항구가 보이지 않는데 잠시 계속된다. 밤이 깊게 와 파도가 높아지면 울면서항으로 돌아온다.
79년 XX월 XX일
배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지중해를 지나 에게 해에 들어가자마자 터키 해협에 이른다. 터키 해협은 모두 남북에서 약 300km 정도가 되지만, 이 해협은 에게 해와 흑해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수로일 뿐만 아니라 동서에서는 아시아와 유럽이 만나는 교량역을 하는 장소이며, 옛부터 신화와 전설, 종교와 전쟁의 역사 무대로 유명한 것이 드물다. 특이한 지세와 수도로 푸른 만장한 문화가 밝은 해협에는 이제 성벽과 기념탑, 그리고 사원과 관광지가 당시의 영고성쇄를 말해주는 것만으로 파도는 여전히 하염없이 구부러지고 있다. 수로도선사 중에는 한국 선원들이 한국인을 알고 있어 나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것은 보통으로 “참전 중에 전사됐다”고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보여줄 수도 있다. 실제로 어떤 전선에서 터키군이 많이 전사한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보통 아버지의 영전에 바치면 위스키 병에 담배 한 만화씩 드리겠습니다. 본선은 잠시 이스탄불 항구에 닻을 내려 대리인이 전해주는 각종 서류와 선원의 편지를 받았다.
에게 해의 해수가 한 번 흑해로 흘러 들어오면 돌아오는데 약 5,000년이 걸리면 수로지에 기록되어 있다. 확실히 긴 회유의 바다, 흑해! 안개가 칠흑인 것 같다고 불리는 미지의 바다 속에서 시원한 수온을 온몸으로 느끼고, 우리의 배는 온몸에 헤엄치고 있다. 곧 물안개가 모였다. 배는 구름 위를 항행하는 느낌이다. 드디어 한마디도 없었던 모스크바에서 전문이 한 장 난다. 내용은 이었다. "귀선 북위 46도 23분 도쿄 30도 48분에 위치한 일리체우스크 외항에 앵커를 내려 대기풍"
이 내용을 우리는 즉시 본사로 옮겼다. 그리고 우리의 배는 마침내 목적지 일리체우스크의 외항에 닻을 내렸다. 아르헨티나를 떠나 장장 7,500해리의 바다를 덮쳐왔지만, 24일 8시간 만에 종착지에 도착한 것이다. 오데사항의 신항경으로 생각되지만, 곡물선만이 수십척 레이더망에 나타나, 항구는 전혀 보이는 얼룩조차도 없다. 물론 오데사 항과 비슷한 척수 배가 레이더 화면에 포도처럼 나타난다. 여기 사정에 밝은 그리스 선장들의 무선통화 내용을 들여다보면 한 달 정도는 대기할지 봤다.
최근 필자가 읽은 외지에 따르면 오데사의 신항 일리체우스크는 불가리아 등 발칸 반도의 나라에 분쟁이 일어나면 탱크 등 장갑 장비를 발진시키는 특수선 기지라고 했다. 한번씩 오는 큰 바람은 여기라면 예외는 아니었다. 해수는 끓고 푸영김이 굉장히 피어 있기 때문에 그 안에 떠있는 배는 크고 작은 것을 가리지 않고 마치 연옥 시련 속에 빠진 모습이다.
그 와중에 보이는 것은 안개와 선화만으로 들리는 것은 VHF 라디오 통화 소리만이 왕왕의 거리이지만, 모두 식수가 바닥이었다고 싸움 법석이지만, 소련인들은 멈추지 않는다. 본선도 재고량이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급수선은 가뭄으로 돌아가듯 한 번씩 떠나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이때는 긴급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대행사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뉴욕에 텔렉스로 조금 넣으라고 전보를 쳤다. "본선 급명간 음료수 고갈. 일리체우스크 항 급수는 거의 불가능. 이스탄불에 회항해 약 200톤 급수가 가능한지 긴급 답변망" 나는 백합이 추천했고, 한 소녀와 함께 눈썰매를 타고 언덕을 미끄러졌다. 한국의 소녀같다면, 두드려 뭐라고 매도했을 텐데, 매우 그 소녀는 적면이 되어 장갑을 낀 양손으로 낯선 사람을 숨기고 있었다. "정말 순진무구하구나"라고 나는 여기에 있었고, 유리는 소녀에 가서 배에서 가져온 초콜릿으로 무안감을 풀어주고 있었다.
배로 돌아올 때는 택시 대신 일부러 버스를 타고 오기로 하여 유리와 헤어졌다. 의외로 일리체우스크에 가는 손님이 많아, 막상 버스에 오르면 앉을 자리가 없었다. 대선배 기관장과 나는 겨우 몸을 흔들면서 시골버스에 곳곳 흔들리는 사정인데 뒤로 되돌아보면 기관장 부인은 특별석에 확실히 자리를 잡고 특유의 미소를 만들고 계시는 것이 아닐까. 너무 빠른 쪽이 있을 수 없는 쪽이 어떻게 현지인들을 되돌아보고 로열석을 차지했는지 신경이 쓰였지만, 나정에게 알고 보면, 그 자리는 차장석이며, 차장이 요금을 징수하려고 하고 있는 동안, 아무도 앉지 못하고 빈 그 자리에 모르고 착석한다.
몸집이 큰 차장은 내 자리에서 비워달라고 말하지 않고 계속 옆에 다소 곳이 붙어 서 부두까지 왔으니까 역시 백성들이 무고한 탓이었는가. 종점부터 본선까지는 타지 않고 밤이 깊고 어두워 눈발이 뿌려졌지만 단지 걸을 수밖에 없었다. 외항에서 대기중단식을 조금 하면 포만과 배를 비운 뒤 기력이 다 소진되어 영하 10도 우크라이나 꿀벌을 2km나 걸으면 젖은 힘을 다해 걸었지만 목덜미에서 차가운 바람이 술에 불어 나오도록 고통받는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려 갈 곳이 없고 그냥 걸으면 아마 이미 쓰러졌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땅에서 그렇게 쓰러져 온 수많은 원혼에 다시 한번 겸허한 마음으로 잡념을 담아 계속 걸어가 드디어 배로 돌아왔다.
79년 XX월 XX일
선원들은 무역을 하고 몇번이나 돈으로 디스코 바 <미국> 같은 곳에 가서 술도 사서 마시고, 아가씨에게 술도 사주고, 또 눈이 맞으면 어딘가에 붙어 가기도 한다. 여관이 없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방을 구해 간다. 마치 폴란드의 작가, 마렉 플라스크의 <제8요일> 장면과 같이, 사방이 막힌 방을 구하기 위해서 헤매는다. 공산주의이므로 병원, 극장, 레스토랑 등 공공시설은 매우 싸지만, 청바지 같은 개인적인 선호품이나 아가씨 같은 개인시설은 20달러 정도를 선호하기 때문에 이를 루블로 환전하면 100루달 이상이 되는 금액으로 의사 한 달 월급의 절반 정도였다. 뉴욕, 암스테르담, 함부르크, 시드니 등 자유국가에서는 개인시설이 어떠한 식당 일식 식사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으로 노상쇼윈도우에 전시되거나 객객거리에 출품돼 박리 팔리고 있다. 인격과 인권, 그리고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와의 함수관계는 알고도 모르는 것이다.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닌 인간 본성으로 해결되어야 할 문제인 것 같다. 80년 XX월 XX일
출항하기 전날 밤 뜸이 선원클럽에 나와 이른바 출항신고를 했다. 댄서 소니아는 음악과 조명에 맞춰 춤을 추었지만 구색도 다양하고 이색적이고 과연 이국적이었다. 특히 그녀의 우크라이나 민속댄스는 선원들의 눈을 독점했다. 백합은 나에게 말했다. “캡틴, 언젠가 시대가 좋아지면, 보르가간의 선도여행에서도 한번 오세요” 저는 관심을 보였습니다. "볼가간의 가항거리는 총 얼마입니까?"
백합은 대답을 척했다. 본류는 3,700Km이지만 모스크바보르가간 운하, 보르가간동간 운하, 보르가간발트해 운하 등이 건설되고, 보르가 강은 카스피해·흑해·발트해 등을 연결하는 내륙 수로로 볼가간 책·지류를 합하면 1만700km.
나는 안에 보였다. 세계 최장의 하나인 강의의 아버지 미시시피 강이 최대 7천Km라고 해도 만 Km이 남아 돌지 말라. 진짜 세월이 좋아져 직접 여행해 보르가 강의 선가를 그들과 함께 합창해 보길 바란다는 희망이 깊게 문클했다. 백합은 나에게 소련의 여러 가지 빛깔의 무늬가 그려진 숟가락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나는 안으로 생각했다. 어디에 가도 밥 먹고 사는 것에 신경 쓰지 않기를 바란다는 의미일까. 우리는 마지막으로 서로 굿 랙!, God Speed!라고 술을 마시고 건배를 들었다. 그리고 헤어졌다.
80년 XX월 XX일
때때로 선원은 선내에서 일어난 일을 관계기관에 투서할 때가 있다. 뉴욕 본사에서 부처에 온 투서의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일등 항해사의 아내가 소련의 미장원에서 머리를 파마해, 선장의 허가 없이 시내를 돌아다녔는데 무엇을 했는지 의문이다”
어쩌면 개인 감정이 아니면, 구부러진 반공 사상을 위해인 것처럼 보였다. 하기야선이 홍콩에 입항해 급수를 해도 수원지가 중공측에 있다는 구실로 선장이 고발되는 사건도 있었다. 북풍이 불어오는 적에게는 한국에서는 호흡도 정지해야 하는가. 이 모든 병폐는 조선 시대부터 내려온 우리 세포 안에 위치한 DNA 때문인가? 세계에 우리와 같은 분단 국가는 유일이지만, 우리 남쪽은 지금 민요나 사와 같은 것이 없어졌기 때문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바위를 양쪽에 던져 지중해를 지키게 했다. 그리스인들은 헤라클레스의 이름을 따서 그 바위를 헤라클레스의 기둥이라고 말했습니다. 해협의 오른쪽에도 이름을 모르는 검은 북아프리카의 산맥이 높아 우뚝 솟아 보이지만, 나무의 한포기 보이지 않는 돌산 연봉이라고 신기하다. 수로에 의하면 본래 해협은 붙어 있어, 지중해는 사막 혹은 계곡이었지만, 수백만년 전에 이 해협이 지각 운동으로 열려, 대서양의 물이 폭포와 같이 수백년을 흘러 지금의 지중해가 되었다고 한다. 하기야 알프스 원래는 바다 속이었다니 세상에 정해진 적은 없다. 있다면 인간이 만든 규정과 명칭 그리고 고정관념이 있을 뿐이 아닌가.
멀리 탄지에르 항구의 하이얀가(Casa Blanca)가 정중하게 시야에 들어오는데, 무어인이 지나가는 배에 손을 흔들고 있는 성을 원한다. 선원들은 될 수 있지만 대서양 소금은 대서양에서 뿌리기도 하려고 비누수 작업에 바쁘다. 우리 배는 다시 에게 해와 터키 해협을 통과합니다. 역사의 굴곡만큼 물 굴곡도 복잡한 바다. 알고 보면 세상에 어디에도 없는 그런 곳이 있겠지만… .
80년 XX월 XX일
23일간의 항해와 7일간의 외항 대기를 마치고, 흑해의 중앙북부에 있는 노볼로시스크 항곡물 부두에 도달했다. 이곳은 5대 소련 영웅도시 중 하나라고 한다. 항구 입구의 큰 석회석 산이 통째로 깎아 부근의 시멘트 공장으로 옮겨지기 때문에 새로운 러시아라는 항구명이 격에 어울리는 것 같았다. 이쪽도 소련의 어느 항과 마찬가지로 작업 우선순위 제1호는 역시 양곡 하륙 작업이다. 곡물작업 유부녀들은 새해 첫날도 없고, 밤낮도 없고, 혁명기념 일도 없었다. 그만큼 그들의 곡물 사정이 나쁜지 보았다. 어렸을 때의 교과서에서 우크라이나 평야는 곡물이 많이 산출되어 주 수출품이라고 배웠지만, 지금은 달라도 너무 바뀌는 풍경이다. 오후에 작업인 남편 중 한 명이 화물열차에서 일해 곡물 속에 묻혀 죽었지만, 그들은 간단한 현장 검증을 마치고 실어 갔다. "유족은 무엇입니까?"
"보상 문제는 어떻게 되나요?"
그러나 둘 다 입을 놓지 않았다. 부두 앞 광장에는 모범노동자의 대형 사진이 꼽히지 않을 정도로 정렬되어 있었다. 오늘 죽은 노동자도 거기에 포함되는 것이. 붉은 깃발의 산 파도의 무리로 한 장의 사진이 되어 유명을 따로 하고 있는 것일까. 선원은 유부녀들과 장사자들에게 다양한 것을 팔고 있다. 문제의 청바지를 비롯해 담배, 시계, 계산기, 달러 등 심지어 허리띠까지 뽑아 팔린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 선원들에게 별로 팔리지 않습니다.
흑해에서도 어떻게 된지 발트해처럼 생선 한 마리도 잡히지 않는 것 같았다. 물고기 없는 바다는 사해가 아닌가? 가끔 곡물검사차에 승선하는 여성들이 통조림과 보드카를 몸 깊숙히 숨기고 들어가 선원들과 비밀로 거래할 수 있을까. 그런 술과 안주를 밤늦은 시간에 조금 맛보게 한다. 「캡틴, 식전에 별미로 조금 들어 봅시다.」
나그네가 객지를 만지면 그 지주 어머니가 추천하는 술에서 먼저 맛을 보지 않으면 거기의 인심을 알 수 있다고 말했지만, 이것은 스타일이 조금 다르다. 그러나, 별미이니까, 술의 모금에 안주한 점을 목안에 건네주고, 항구의 풍물시를 상상해 본다.
80년 XX월 XX일
아침부터 소련군 4명과 대리점 직원 1명이 승선했다. 그들은 착석하자마자 임원 한 명이 경고를 낭독했고 대리점 직원이 이를 통역했다. 내용은 이었다. “밤의 한밤중에 새벽 1시 사이에 본선의 승하차 선문을 지켜 서 있던 당직의 병사에게 선원들이 빈 맥주캔을 몇 차례 창문에서 던졌다.
그리고 문제의 경고 문장을 내 책상 위에 놓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증거물로 캔 3개를 제시하고 어느 창으로 투척되었는지를 설명해 잡아간다고 한다. 그리고 선원들이 상륙 금지라는 한국 정부 측 지시를 위반한 사실도 뉴욕에 통보한다고 한다. 선원들은 세계 각지로 돌아다니며 별의 별사고를 연출하지만, 막상 이런 일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가 난감된다. 술에 반공사상이 충동질해 적군에게 하늘의 캔에서도 던지는 의를 결행했는가. 단순한 주사?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서부극을 봐도 뒤에 숨어 타인에게 총질이나 「이시하치 매도」를 본 기억이 없다. 나는 그들에게 선원의 행위를 반복해서 사과하고 곧 공식 사과문을 제출하겠다고 약속하고 마침내 돌려주는 데 성공했다. 대행사 직원 이반에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상담했지만 역시 선물을 조금 납품하는 선으로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능할까 걱정하면 자신과 사무장에게 맡길 것이라고 말했다. 사무장이 이반과 함께 감시병 초소에 가서 선물과 사과문을 바치게 했다. 노익장 기관장에게 사건 내용을 말씀드리면 평평한 말. 「만약 미국에서 경찰에 했다면 경고문이나 전해 갔을까?
올바른 단어. 이들은 대통령에서 거지까지 걸면 총기를 난사해대는 습성을 갖기로 하는 말이다.
80년 XX월 XX일
오늘은 레스토랑에서 소련인들과 약간의 시비곡절이 있었다. 소련에서는 암돌상과 환전할 때 야바위에게 특별한 주의를 요한다. 예를 들면, 레스토랑에서 환전을 할 때, 그들은 한 번 화장실에 가자고 말하는 데 따라잡을 때까지 좋은데 100달러를 건네주고 400루블을 받을 때 가지고 있는 유리의 거주를 지불하면서 루불화 수량을 속입니다. 설령 지폐는 한국 복권의 크기만으로, 한편, 그들의 손 크기는 우리 손의 두 배 가까이 크기 때문에 설령 야바위인의 손에 든 루불화는 마치 한국의 내기 중 놀이 화장장의 기세와 같다.
예를 들면 이렇다. 100달러를 보여주고 400루블을 받는다. 측정해 보면 350루블이 된다. 그는 이상하다고 하면서 자신이 잦아 확인해도 350루블이다. 그는 그 돈을 우리에게 주어 포켓에서 50루블을 꺼내 400루블을 채웠다고 하지만 실은 역시 350루블이다. 왜 그런가. 350루블을 확인하고 한층 더 손에 넣은 손은 이미 350루블에서 50루블을 때리며 포켓 안에 들어갔는지 빈손으로 돌아와 자신의 돈 50루블을 새로 가져온 것은 결코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기가 1개 2개가 아니었다는 것이 선원의 공통 경험이었다. 그는 야바위인이 아니라 전문 마술사로서 무대를 레스토랑 화장실에 착용했다. 그러나 이것은 약과의 사건이 있다. 우리 선원 한 명이 테이블 위에 카메라를 싣고 있었지만, 어떤 사람이 지나가서 그 카메라를 잡았다. 순간 우리 선원이 놈의 카메라를 잡은 손 위를 덮쳤다. 이럴 때는 놈의 손은 카메라를 놓는 방법인데 계속 놓지 않았다. 옆에 여자들이 놓도록 외치더라도 결코 놓치지 않았지만, 맞은편에 가족과 식사하던 신사 중 한 명이 건너와 맥주병으로 녀석의 머리를 잡고 조금 손을 뒀다.
여기서 맥주병은 우리나라의 맥주병보다 훨씬 크다. 이와 비슷한 습격은 다른 나라에 가도 더러워진다. 그러나, 여기의 명색이 빛나는 찬드리에가 비치는 레스토랑이 아닌가. 한때 한국에 다와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었다. 알고 보면, 이 말은 촬영의 말이며, 그 전형을 우리는 「카메라의 덮개」로 본 것이다. 레스토랑에 들어가면 투숙객은 코트와 모자 등을 입구 보관소 직원에게 맡기고 티켓을 받게 됩니다. 나는 코트와 모자를 맡겼지만 직원은 코트에 후크가 없다는 토핑을했습니다. 5루블을 주었다. 나올 때 표를 건네주고 코트와 모자를 받아보니 이번엔 모자에서 알프스 등산기념 메달이 사라졌다. 다와이된 것이다. 돈을 주면서 돌아오려고 손님이 많아서 그냥 나왔다.
80년 XX월 XX일
조금 나와 원한다는 연락을 받고 대리점(Inflot) 사무소에 들렸다. 임플릿 선박부 사무소는 낮에도 어둡다. 벽은 두껍고 창문은 작고 조명 시설은 열악하고 사용하는 용지는 말분지의 색으로 비슷한 막심 고리키(凄恥意)의 고서재에 들어간 것 같았다. 그런데 한 구석에 우리의 선선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그 친구가 여기서 무엇을 할까?" 하고 있었지만, 스탭의 이반이 어디서 서류 한 장을 가져와 보여주면서 말했다. “캡틴, 다름이 아니고, 그 선원이 쏘는 여성과 함께 있어, “매춘 방지 특별법”에 의해 체포되었습니다. 물론, 외국인 선원은 별일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감옥에서 출감자라도 맞이하듯 그를 데리고 고리키의 서재를 나왔다. 공산주의의 순결에서 추방되는 자본주의의 탕을 인수해 나오는 마음은 잡을 뿐이었다. "무슨 여자였어?" 나는 물었다.
「레스토랑 Black Sea(흑해)에서 만났습니다만…」 그는 계속 머리를 긁었다.
"어디서 잡았어?"
"여자 아파트에서 잡혔다"
"누구에게 잡혔어?" 신경이 쓰여 계속 물었다.
"붉은 완장을 두른 청년들 56명이 현관 문을 두드리면서 밀려들었습니다."
「여성은 어땠어?」 제일 신경이 쓰이는 점이다.
"가라가라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에게 돈을 주었다는 목소리를 하지 않으면 좋겠다"라는 가파른 시를 세우고 문을 계속 끌고 울면서 일용품을 손에 넣고 어디로 갔다.
여자는 어디로 데려갔는지 궁금했다. "차마시베리아에 유배되지 말았을 것이다"라고 그녀의 불운을 마음 속으로 위로해주고 배로 돌아왔다.
81년 XX월 XX일
노보로시스크 항구를 나온 이래로 다시 시리얼을 운반하기 위해 미시시피 강 하항 뉴 오리온스에 왔습니다. 미시시피 강은 올 때마다 마크 트웨인을 떠올린다. 그의 작품 톰 소요의 모험, 해클베리 핀의 모험 등은 그 배경이 항상 이 강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이 강의수부였지만, 278세 때 강의도선사가 되었지만, 본명 사무엘 랜헌 클레맨스 대신 마크 트웨인(Mark Twain)으로 개명을 했다. 선원으로서 이 필명의 사정이 재미있다. 당시에는 강이 완전히 준설되지 않고, 수심 측정기도 없고, 수심을 수작업으로 측정해 나가면서, 수브가 선수로 무거운 추가 달린 끈을 강 속에 던져 수심을 스톡 브릿지에 큰 소리로 알렸다. “Mark 10(수심 10자)!” 혹은 “Mark 20(수심 20자)!”
이것이 매우 인상적이었고, "마크 트웨인"을 필명으로 많은 문장을 썼다. 추사, 이시이, 만송 등이라는 작호문화와는 크게 다르다. 헤밍웨이와 윌리엄 포크너도 미국 문학의 아버지라고 칭찬한 인물이며 인간이란 무엇인가 등의 후속작품을 계속 발표해 여성인권운동과 노동운동, 노예제도 철폐운동에도 참여한 선각자였다. 차제에 그가 남긴 멋진 글을 몇 줄 소개해 본다. "장례사조차도 죽음을 슬프게 해줄 만큼 멋진 삶을 보내세요."
"인간은 달처럼 보이고 아무도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어두운 면이 있다"
"잊을 수 없는 것이 기억나지 않는 것보다 훨씬 위험합니다."
“침대는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다. 80% 이상의 사람들이 거기서 사망한다”
"교육은 모르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지 않을 때 행동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줄을 좋아한다. 마크20 이후 미시시피의 하상은 준설을 계속해 지금은 마크40, 마크50이라는 시대가 되어 수만 톤급의 선박이 수천 Km을 소강하고 있다. 그래서 지금은 수심 대신 수십 피트 높이를 자랑하는 뉴오리온스 대교들이 대형선의 돛대에 걸리는 일이 발생해 공심을 신경 써야 할 일이 발생하고 있다.
수로 상황도 바뀌었지만 민심도 많이 바뀐 것 같다. 톰 소요나 하클레이핀이 날아다니는 강둑에서 한국 선원들이 산책해 와서 마을 흑인 사랑들의 총격을 받고 피살되기도 했다고 여기 한국선 식품업체가 말한다. 권총의 강도가 출몰해, 이웃 배에 침입해 선장실의 금고를 털어놓은 적도 있다. 일어난다.
우리 일행은 재즈의 본고장 바본 스트리트에 바람이 흘러나왔다. 복잡한 어려운 역사의 흔적은 지금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도시에서도 프랑스를 느낄 수 있는 프렌치 쿼터(French Quater)가 있다. 200년 전의 귀부인이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창문을 밀어 올리는 발코니가 있는 건물. 그 발코니에서 흑인 뮤지션들이 재즈를 연주하고 있다. 흰 슈트에 구리색으로 점멸하는 악기, 그리고 땀이 보내진 흑인의 악사들의 하이얀 잇몸이 재즈를 씹어 늘어난다.
루이 암스트롱을 연상시키는 트럼펫 연주자의 모습이 팩 인상적이다. 도시는 그의 대표곡 ‘놀라운 이 세계(What A Wonderful World)’의 머물렀다. 재즈클럽에게 물려 한 잔의 위스키로 여독을 풀어 호화 찬란한 눈사람까지 환상 속에 빠졌다. 귀에 익숙해지면서도 마음이 과도하게 떠오르지 않도록, 그러나 몸은 리듬을 타게 하는 재즈곡이 계속되었다.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연주자에 의해, 관객에 의해 색이 미묘하게 바뀌는 재즈의 매력에 심취했다. 미국에서 밤 문화가 가장 찬란한 도시가 버번 스트리트가 아닐까 생각했다. 사람들은 자유분방 자체였다. 뉴욕 타임스퀘어는 밤 거리가 위험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강을 따라 나와 레스토랑에서 여기의 명물 생 가마를 먹었다. 미국은 한국에서 굴을 수입한다고 했지만, 만약 우리가 먹고 있는 굴이 한국의 청정해역에서 생산된 수입 굴이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먹었다.
81년 XX월 XX일
미시시피 강을 타고 26일 만에 흑해 연안 조지아소 연방의 바투미 외항에 도착해 앵커를 내렸다. 코카서스 산맥의 연봉들이 멀리 북동쪽으로 위용을 흔들어 뻗어 있으며 남쪽에는 터키 영토가 보인다. 터키 영토는 지중해 동부에서 터키 해협을 건너 다시 흑해 동부에 이르기까지 면적이 상당히 넓다. 한국의 8배 높은 일본의 2배가 된다. 또 멀리 내륙 깊은 노아의 방주로 유명한 아라라트산(해발 5,167m)의 웅대한 영봉이 아르메니아인들의 많은 사정만 구름에 숨겨져 있다. AD 300년경 아르메니아는 기독교를 세계에서 처음으로 받아들인 나라이며, 우리가 받은 그루지야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받아들인 나라다.
대리점이 일주일 정도 외항대기라는 연락을 했고, 우리는 열중 휴가에서 릴렉스 자세에 들어갔다. 이 일대는 종교뿐만 아니라 신화로도 유명한 장소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프로메테우스 신은 신들의 왕 제우스에게 몰래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죄로, 코카서스 산의 바위에 쇠고기와 나란히 매일 이글들에게 간을 나누어 먹는 무서운 형벌을 받는다. 한편 인간은 문명을 밝혔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전설에 따르면 영웅 이어슨과 함께 황금 양모를 구하기 위해 코르키스에 떠난 50명의 영웅들을 태운 배를 아르고호로 하며 아르고선의 선원들이라는 의미로 아르고나우타라는 말이 나온다. 여기서 코르키스는 그루지야 왕국을 말했고, 황금 양모는 코르키스 왕국의 보물 퀴소말로스라는 날개가 있는 황금색 양모가죽으로,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이 지방의 스트림에는 사금이 많아, 물에 양모를 씻으면 사금이 붙어 황금색으로 바뀌었다. 실제로 이 지역에 있는 양 방목은 잠으로 고명하다. 그리고 아르고나 이타이를 영어로 Argonaut라고 표기하지만, 우주선 Astronaut에서 Astro는 우주의 의미이고 naut는 항해의 의미이다. 선원은 물었다. "광천수 이외에 무엇이 유명합니까?"
그녀는 와인이라고 말했다. 물론 선원들은 오시그, 좋아라는 마음이었다.
선원은 신이 나오고 계속 물었다. "또한 유명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녀는 잠시 후 대답했다. “우리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던 스탈린은 내 산을 넘어서 고리 출신이다. "
우리는 잠시 물고기를 마셨다. 그녀는 잘못 대답한 것 같다. 그리고 화제를 바꿨다. "여기에는 백세 이상의 노인으로 구성된 합창단도 유명하지 않다"
우리는 정말? 정말? 그러면서 숲 속을 돌아다니며 오르가얀은 하이얀 제등의 꽃이 핀 야생 계란을 흙대로 파고 풀 줄기로 감싸주고 배에서 키워 보라고 했다. 그리고 식물원 입구에서는 직원들이 눈에 띄지 않게 잘 숨겨달라고 했다. 숲 속에는 동백나무에 차나무도 보이고 만져 있었지만, 올가씨는 차라고 말했다. 중국에서 온 야생 차 나무라고 들었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여기 말에서도 차라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마 실크로드를 따라 들어온 것 같습니다. 저녁에 오르가얀은 우리를 바투미 관광호텔 앞에서 내려다보고 돌아왔다.
한 줄은 호텔 레스토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식당 규모나 종업원 수에 비해 메뉴가 별로 없는 것은 바투미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선상에서 매일 먹는 냉동식품보다 바삭바삭한 샐러드에 구미가 당겨 많이 먹었다. 양념은 우리처럼 마늘도 있고, 파도도 있고, 맛사그레한 싹과 고추도 있고, 입안을 개운시켜, 특미 케비아와 훈제 생선들은 소련항의 어느 곳에서나 나오는데, 여기는 부근의 카스다메에서 철갑상어가 많이 잡히고 그런 것을 더 주는 것 같다. 세계 3대 진미에 속한다는 귀중한 케비아가 마치 명태자처럼 나온다.
영어로 Caviar to the general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 말로 직역하면 일반인에게 나비상어의 알편이라는 뜻이겠지만, 의역하면 일반은 모르는 진미 정도가 된다. 비하아로서는 「개발에 간다(주석편자)」도 된다. 지난번 레닌그라드 <달러숍>에서 20달러의 케비아 캔을 샀지만 용량이 오늘 우리가 먹고 있는 양의 2배 밖에 없었기 때문에 지금 식탁에 오른 케비아치만으로도 10달러가 되는 것이다. 20달러라면 아가씨와 데이트도 할 수 있습니다. 실수하면 봉황을 겪을지도 모르지만… 답례로 건네받은 말보로 담배에 남녀 모두가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몰랐다. 차갑게 취해 멋지게 장식한 관광마차를 타고 배로 돌아오자 제정 러시아 때의 귀족이기도 한 느낌이 들었다.
81년 XX월 XX일
시장에 가는 도중, 우리 일행은 상가에서 모자의 집을 한 곳 발견해 들어갔다. 레닌을 연상시키는 모자가 줄지어 있었지만, 모두 고가로 보이는 양가죽 모자였다. 전설의 황금 양모로 보고 양이 많은 고장이라고 생각되었다. 노후화한 점원에게 값이 얼마나 묻는지 Cavier to the general(개발하러 간다)처럼 단지 나간다는 제스처였다. 이런 실례에 대해 화난 사무장이 100달러를 몇 장이나 그의 코 아래에 내밀면 안쪽의 작업실로 도망쳐 버리는 것이 아닐까. 역시 순진한 사람들이었다. 아무도 나와 본 적도 없었다. 벽에 걸린 액자 스탈린이 우리를 노려 보았을 뿐이었다. 일행은 부근의 시장에 들어가 있었지만, 드문 점은 시장에 물고기와는 구경할 수 없고, 대신에 기화 요강으로 진정한 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우와 대단해!」 「하향기가 좋다!」가 연발이었지만, 나는 그 소용돌이 중에서 매우 잘 익은 오봉봉감홍시를 발견해, 혼자를 샀다.
언젠가 방글라데시 강변의 시골길을 걸을 때 한 할아버지가 향기나는 자연산 두리안 둘을 나무 그늘 아래에서 팔고 있었지만, 그때 느낀 발견의 경이 같은 것을 똑같이 느꼈다. 일행은 우선 길가의 벤치에 위치해, 오미네 감홍시를 먹었다. 고향의 가을이 눈앞에 있던 것 같은 느낌에 젖어, 그 많은 홍시를 모두 먹었다. 점심 때도 진미케비아도 더 이상 먹고 싶지 않았다. 일행은 택시를 타고 시내를 일주하면서 되돌아 보았다. 이곳은 해변에 모래사장은 보이지 않고 자갈 해변만 보였다. 역시 지형이 드문 나라다. 물론, 그런 지세에 사는 사람들의 판매자는 드물지 못하고, 기구를 할 때까지 하고 있었다는 것이 동서고금의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트랩(현관 사다리)을 지킨 병사가 앰블런스에서 불러 환자를 서둘러 병원으로 옮기게 했다. 의외로 엠블런스가 빨리 와서 대리점의 스탭도 거기에 타 왔다. 그를 태우고, 우리는 어느 긴급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은 많이 낡았고, 설비다운 설비도 보이지 않았고, 간호사들 역시 70세를 넘어 보이는 분들로 움직임도 늦었다. 당직 의사는 환자를 앞뒤로 진찰하기 시작했다. 자,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서 아침 일찍 출항해야 했기 때문에, 나는 곁에서 초조해 보고 있었습니다만, 갑자기 의사가 나의 바지의 가랑이를 당기는 것이었다. 무슨 일이야?
의사는 비즈니스... 비즈니스...를 속삭였다. 나는 청바지와 같은 것들과 다와이를 조금 하지 않으면 잘 보겠다는 의미의 줄을 드디어 알고 있었다. 나는 대기실 딜러 직원에게 가서 말했다. "아무래도 환자를 이스탄불까지 데리고 가서 거기서 입원 치료를 시켜야 합니다."
대행사 직원은 단번에 갔다. “켐틴, 환자는 이스탄불의 절반까지도 할 수 없어서 죽었습니다. 제2차 대전 중에 여기에 보내져 온 수천명의 집중 환자를 우리의 의료 스탭이 모두 살았습니다.안심해 주세요.아침에 수술이 시작되도록 준비를 하였습니다.
나는 안에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 병원에서 죽어갔다는 것이다”라고 바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있었다. 한동안 정군의 잠든 상태를 지키고 보다 병원을 나섰다. 곧 작업이 완료되면 외항으로 배를 옮겨 봐야 했다. 밤의 깊은 바투미 시가는 짖는 소리조차 조용했다. 부두 정문에서 차를 내려 가라앉은 부두 속으로 걸어오는데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있어 되돌아보니 경비병 임원이었다. 그는 환자를 위해 걱정의 제비를 저를 이해하고 있다 조용히 말했다. 우선 그는 선원 명부를 펼친 곳에 선원 한 명을 손으로 찍고 "이 선원이 그 밖에서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안에 "정말로?"라고 그를 바라 보았지만 그는 목을 당기는 것이었다. 배에 들어가서 찾아보니 그는 역시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정문에 나와 그 임원을보고 물었다. "어느쪽에 있니?" "여자와 함께 있나요?" 손으로 가리키는 분을 가보니 정문을 건너 아파트의 마을인데 모두 소등하고 전혀 콩콤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쓰레기의 산 같은 쪽에서 사람인가 고양이인가가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응답이 없다. 배로 돌아와 선원을 데리고 나와 찾아보려고 했지만, 그의 나이와 처지를 생각해, 나 혼자 조용히 불러내기로 했다. 「박씨」, 「박씨」 굉장히 부르고 있으면, 그 임원이 언제 옆에 왔는지 조용히 와, 의심스러운 방향과 장소를 향해 순간 프레쉬 라이트를 비추었다.
그러자 겨우 박씨와 아가씨 한 명이 벽에 대해 서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장교가 설현어로 무어라고 외치자 아가씨가 박씨를 데리고 천천히 이쪽으로 건너기 시작했다. 가까이 와서 그녀가 장교 보고 무어라고 손을 흔들며 말하는 사정을 추정했지만, "이 사람이 술이 취해서 배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해 데려 여기까지 나왔다"는 내용으로 보였다. 박씨에게 타일을 붙였습니다. 「급사정군이 부상을 입고 병원에 실렸지만, 박씨까지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된다? 빨리 배로 돌아갑시다」
그는 "죄송합니다. 장교는 양손으로 그의 손을 제대로 붙잡고 감사를 표했고, 곧바로 배로 돌아와 사무장을 통해 담배 한 그릇을 전했다. 남자와 남자의 국경과 이념을 넘은 인간미와 같은 것을 느꼈다.
81년 XX월 XX일
새벽에 하역 작업이 끝나자 도선사가 와서 배를 부두에서 가까운 외항으로 옮겨 앵커를 내려 돌아왔다. 지금은 대리점과 정군을 기다리는 것만 남았다. 아침 10시가 조금 지나서 대리점 직원 한 명만이 통선편으로 배에 왔다. 출항 서류와 함께 의사의 진단서를 전했다. “환자는 후두부의 뼈가 부러져 수술과 약 1개월간의 입원 치료를 필요로 한다”고 쓰여 있다. 출항 수속을 마친 후, 대리점 직원은 한 장의 메모를 환자가 주었다고 나에게 건네주었다.
피빌리피라고 쓰여진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선장, 난 이제 괜찮아요. 제발 더 배에 길을 데려가주세요." 순간 딜러에게 외쳤다. "Not Too Bad(별로 나쁘지 않을까!)!"
예고 로프 씨는 목을 설레게 흔든다. "잠깐의 약발 탓입니다. 지금쯤 수술대에 올랐을 것입니다. 믿어주세요"
나는 정군에게 충분한 달러나 의사를 비롯한 간호사,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선심하도록 담배, 껌, 과자, 청바지 등의 설령인이 좋아하는 물품을 그의 가방에 가득 넣어 직원의 예고 로프 씨편으로 불렀다. 그리고 소련에 체재하는 동안의 주의사항과 예상 귀국 경로까지 적어 두었다. 무엇보다 서울로 귀국할 때 지켜야 할 사항을 세세하게 썼다. 흑해까지 나와 두개골을 긁어 코카서스의 바닥 타는 문턱값까지 갔다.
무엇보다 대리점 직원 예고 로프 씨에게는 「특별 부탁의 말과 선물」을 잊지 않았다. 마침내 "올 스텐바이!"벨을 울렸다. 떠날 때마다 홀이 분해되지는 않았습니다. 정군이 무사귀국 하련하는 걱정이 흑해의 짙은 안개와 함께 점점 눈앞을 덮었다. 외항에 나오자마자 뉴욕 본사에 전보를 넣어 사정을 알렸다. 지구의 반대편에서 곧바로 대답이 왔다. “환자의 신변을 일절 보장받은 것으로 안심풍. 선원들의 노고에 감사한다.
82년 XX월 XX일
아르헨티나의 바이아 블랑카 항구를 나와 발틱해에서 항해중 급유차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의 중앙에 위치한 라스팔마스 항구에 다시 들렸다. 여기를 우리 선원들은 유럽의 제주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날씨가 온화한 관광지이기 때문이다. 뉴욕에서 뿜어낸 서류 봉투 속에서 선원 가족의 편지도 함께 쏟아지고 있다. 그 가운데 서울에서 아버지 정군의 편지가 나를 가장 기쁘게 했다. 물론 그의 안부를 뉴욕에서 잘 듣고 있었지만, 막상 그의 친필을 만지자 어떤 연인에게서 불어온 편지처럼 가슴이 설레었다.
내용의 요지는 이었다. "약 30일간의 바투미 병원 생활을 마치고 모스크바, 파리, 동경을 경유해 무사히 서울에 입성해, 여관에 들어가자마자 펜을 들었습니다. 나라를 기원합니다." 엘레나는 또한 동화의 동화에서 다시 우리를 웃었다. "이 부근에 회춘의 약수장이 있었습니다만, 영감은 적당히 마시고 청년이 되어, 부득이한 과음으로 아기가 되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는 장소를 지나고 있습니다."
선원들은 한마디로 킬킬을 했다. "진시환이 코스를 잘못 잡았다" "병마총군사를 일으켜 리가로 진군해오네"
소련은 어디로 가든 경작지에 울타리가 없었다. 끝없이 펼쳐지는 포도밭이나, 혹은 체소나 과일 농장에도 울타리가 둘러싸이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물론 공산주의 집단 농장이기 때문에 그랬다. 대각선 논과 탄자나무 담의 과수원의 길과 같은 소위 로망은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엘레나 씨는 우리가 친 스페이스 머신을 있는 황성 고적에 안착시켰다.
중세 십자군이 원정을 왔다는 폐허에는 울새와 이끼가 덮여 있으며, 유물관 진열장 안에는 녹슨 투구와 문 창구만이 속속 진열되고 있다. 관광객이 하늘의 요새 주위를 걷기도 하고, 때로는 구형 카메라 앞에 10명씩 20명씩 모여 중세의 테두리에 딱 포즈를 취해 기념 사진을 찍는다.
물론 우리는 타인의 과거사에 연기하는 기념대로를 했고, 꼬리를 잡고 봉인된 현실 저편의 상황이 익혀 스냅도 한 장도 찍지 않았다. 역시 엘레나씨가 왜 카메라를 들고 나오지 않았는지 물어 사정을 조금 말했더니 “처음부터 출국조차 불가능한 우리보다 낫다”고 들었다. 다시 우리는 숲 속에 있는 현대적인 레스토랑으로 옮겨왔다. 지붕 디자인이 큰 우산 버섯처럼 보였지만, 그 아래가 레스토랑이다. 생전 처음 먹는 라트비아 요리와 전통주는 우리의 호기심에 완전히 깎여 맛있게 되어 목덜미를 타고 옮겨가고 있다. 때때로 눈에 띈 것은 거리의 식당에서 본 왕염과 생파, 그리고 밀과 소의 똥 빵을 씹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소련은 격전지마다 어머니의 땅이라는 구호와 검을 높이 뽑은 여성상을 세웠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선원들은 엘레나의 마이크를 받아 각각 한 곡씩 노래했다. 오늘도 걷는 다마는 정치가 없는 이 보도에서 돌아와 부산항 등까지 레퍼토리를 다해 덤으로 불렀던 이름이 되어 엘레나로 바뀐 승이로 마침표를 잡은 기관장이 오늘 인기상을 받고 마이크를 다시 엘레나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엘레나에게 한 곡을 듣는 것을 잊지 않았다. 엘레나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순수한 라트비아의 노래를 부르려고 했던 곡조 해방했지만 한국 가수로 치면 심스본의 엘리지를 듣는 듯한 감정을 풍겼다. 라트비아인 중 하나를 전파했을까. 한층 더 놀라운 장면은 잇달아 일어났지만, 놀라움의 사이였다. 제3의 ‘신사복장’이 너무 정확한 태권도 벽돌 격파권법으로 그 가격자의 목덜미를 낮추는 것이었다. 나는 회장이 엉망이 될까 걱정했지만 그것도 기울었다. 심각성을 직감한 주위의 한 줄이 마치 체내에 들어온 병원균을 포위하는 백혈구처럼 당사자를 거듭해 안아 눈덩이처럼 크게 묶여 급속히 밖으로 나갔다. 사태발생부터 정리까지 걸린 시간은 수십초 이내였기 때문에, 전방만 보고 있던 관중에게는 후무대의 이 샷씬이 관람되지 않고, 매우 다행이었다.
오늘 저는 눈앞의 무대에서 펼쳐지는 뮤지컬 쇼보다 눈 뒤에서 열린 주최측 쇼에 더 많은 관람신경을 사용했다. 며칠 전, 시내에서 서커스를 단체 관람한 뒤 막말의 시간을 얻어 우리 선원 한 명이 태권도 시위를 몇 장면에 보여줬지만, 인기 폭발에 더해 즉석 펜이 나란히 가서 인솔 장교 엘레나 씨가 큰 곤혹을 한 적이 있다. 아마 북한을 통해 태권도가 소련사회의 저변으로 널리 퍼져 있는 것 같았다.
결투의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에 미국에서 본 장면을 한편으로 소개해 보자. 한 술집 앞이었지만 갑자기 두 명의 오랜 세월이 맞서 결투를 펼치는 것이었다. 어느 때는 얽혀 땅을 굴러가거나, 또 어느 때는 주차해 둔 차에 몸을 붙이고 싸우기 위해 세운 안테나를 뿌리거나 하면서 열전이었지만, 남녀 구경꾼은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고 무심하게 구경만 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쓰러뜨리고 손을 비틀어 등에 붙였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알리는 것이었다. "나는 경찰관이다. 뒤에 포켓 수갑을 조금 꺼내라."
구경꾼들은 그 무렵 목을 당겨 그 중 한 명이 수갑을 꺼내 붙잡아 주자 철거덕을 채워 연행해갔다. 경찰과 수배인과의 격투였던 것이다. 조금 있으니까 돌아와서, 프라트린 안테나에 대해서 차주에게 어떤 서류를 건네주었다. 미국 같은 경찰의 결투 장면이었다. 단지 총총만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았다.
83년 XX월 XX일
북미 오대호에 들어가는 배로 나는 옮겨왔다. 옛날, 일등 항해사 시대에 오대호에 몇 차례 들어온 경험이 있다. 선원들은 오대호에 들어가는 것을 매우 사라지고 있다. 그만큼 어려운 선도이며, 고시된 배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세인트 로렌스 수로는 본격적으로 캐나다 몬트리얼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본선 파이오니아호는 퀘벡항에서 화물의 일부를 내려 다시 몬트리얼항에 도착해 하역도 했고, 본격적인 수로 통항 준비를 한다. 목적항 스피아리아호의 달스항까지는 1만리(약 4,500km)가 훨씬 넘는 길이지만, 우선 필요한 장비와 충분한 선식을 보급해 최초의 갑문을 통과한다. 우선 세인트 로렌스 수로에 대해 대략 살펴본다. 협수로(세인트 로렌스 강)는 몬트리얼 항구와 온타리오 호수 입구까지 약 300km로 그 사이에 갑문이 7개 흩어져 있다. 온타리오 호수 약 300km를 건너면 40km 정도의 서호면에 배를 띄워 올리는 갑문이 8개나 집결되어 나타난다. 두 호수의 고도차가 부근의 나이아가라 폭포 정도이기 때문에 약 99m를 연어가 물 계단을 타고 오르듯 배도 갑문을 타고 오르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슈피아릴로호 입구에 있다. 강의 마지막 갑옷은 이름이 일리코이(Iroquois)이지만, 일리코이는 여기 인디안족을 말해, 그들이 마을을 캐나다라고 부르는데 캐나다라는 나라명이 유래했다고 강도선사가 설명을 한다.
갑문 8번은 교묘한 백리도(43Km)에 갑문이 8개나 집결되어 있어 선원과 선장도 긴급근무에 지쳐 영혼이 빠져 귀천이 도망친다. 시설이 나 아무리 장대해도 배를 그냥 들어 올리는 것은 아니다. 좁은 갑문에 들어가 다시 나와 입출항에 비하면 16회 가는 셈이다. 아주 짧은 시간에 말한다. 오히려 하루 종일 그 길을 걷는 것은 별로 피곤하지 않습니다. 갑문들을 벗어나면 마치 울안을 벗어난 들소들만으로 해방감을 만끽한다. 일리호의 물건 속에 안겨, 실칸의 잠에서 자신도 한다. 누가 호수는 달의 거울이었는가. 밤하늘 달이 선원들의 노고를 접하고 있는 것 같다. 호수에는 호수의 도선사가 수로를 안내해 간다. 그동안 나도 조금 쉬었다. 제목 : 5대호의 거대선들 이 사진은 온타리오호를 건너 시카고로 항행하는 곡물선 G3후작(Marquis)호를 사진가 Thomas Fricke씨가 찍은 것이다. 그는 지금 사진에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갑판에 서 있다. 왼쪽 상단의 작은 기사 내용: “우리의 대부분이 만지지 않은 수천만 달러의 사업.
그리고 오른쪽 문장 내용: “ACC사의 벌크 운반선 G3 후작호가 몬트리얼의 성 램버트 갑문에 천천히 들어가는 것을 보고.의 TD은행의 건물을 옆에 누운 것과 거의 같다.
82년 XX월 XX일
배는 클리블랜드 항구에 도착하여 짐을 계속 내렸다. 오하이오주의 클리블랜드시는 그다지 관광지가 아니며, 년 중공업의 쇠퇴로 인구가 빠져나와 그 후 항구 부근의 건물은 수산해 보였다. 그러나 식물원과 박물관은 조용하고 우리에게 더 좋았습니다. 밤의 번화가 바에는 사람들이 더러워졌지만 지친 친구가 없었기 때문에 마음을 놓아도 좋았다. 세계는 진짜로 아이러니하게 변화 무쌍하다. 여기서 철강품이나 자동차를 태워 아시아 측에 배가 갔는데, 순식간에 지금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마치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가 그렇다. 지구는 둥글게 움직이는 것이므로, 과연 정해진 적이 없다. 우리 배는 다시 약 200km를 움직여 미시간의 디트로이트 항구에 입항했다. 겉보기에 한산하는 것은 클리블랜드와 비슷했다. 일찌기 이곳은 자동차의 메카이며, 제2차 대전의 특수시인 1950년경에는 인구가 200만에 가까워, 미국 제4대도시였지만, 지금은 이미 슬슬 망해 가면 도선사는 듣는다. 오대호 연안의 다양한 항구를 찾아와서 이렇게 곡물을 모아 끝까지 묻는 퀘벡 항구에 갔다. 이것이 오대호식 곡물 적재법이지만, 이것은 하천 특히 갑문의 수심 제한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서남부 항구라면 눈이 비와 비가 내리고, 왜냐하면 이틀 이내에 약 3만 톤의 적하를 한 곳에서 마무리한다. 그리고 곧 출항하지만 해운업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특징이 있다. 출항한 지 하루가 지났다. 파이오니아 호수는 수트 갑문과 세인트 마리 강을 통과하고, 또 하루 남쪽으로 내리면 세인트 클레어 강 물고기의 캐나다측 사니아 항구에 도달할 것이다.
83년 XX월 XX일
사니아항에 입항한다. 하역이 23일 걸려 선원들은 대부분 부근의 공원에 나와 놀았지만, 잔디의 촉감도 좋고, 건너온 휴런 호수의 푸른 파도도 높아졌을 뿐만 아니라, 사니아 시민들의 가족의 외출이 모습이 아름답고, 절에서 눈길을 끌고 있었다. 다양한 아기로부터 젊은 부부 그리고 아가씨 또한, 혹은 나이 채워진 노인들의 부드러운 표정에 사람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매우 좋았다. 캐나다는 공원에서 마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무료 행 중 일부는 택시를 타고 상점가에서 나들리에 갔다. 돌아오자 술 한 잔과 컵을 구입해, 안주로 바삭바삭하게 보이는 철간을 선택했다. 찍어 먹는 소금과 속삭이는 작은 칼도 하나 샀다. 그리고 우리는 인적이 드문 어느 길가의 초원으로 옮겨 자리를 잡았다. 검이 문방구용이므로 너무 작아서 큰 철간을 토막 내기 어렵고 대체로 잘라 입에 넣으면 입수변의 경치가 벌채되어 재미있었지만 보는 사람이 없어 한잔 넘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재미있는 피크닉이었다.
그때였다. 경찰 순찰차가 달려와서 우리 옆에 차를 세우면 무엇을 하는지 물었다. 우리는 철간을 입에 문의 발간 입술을 선택해서 말할 수 없었지만, 그들은 옆에 와서 상황을 파악했지만, 일행을 모두 차에 태우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나는 왜 그런지 물었더니 고속도로를 따라 음주 행위는 불법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경찰서에 잡혀갔지만, 우리가 자신들이 수확한 곡물을 얹어 가는 외항선 선원들이라는 점을 감안해 배에까지 친절하게 줬다. 기분은 부상이었지만, 택시비를 가지지 않고 배에 돌아온 것으로 만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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